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남 사건 (문단 편집) === 무력충돌의 발생 === 국민혁명군의 지난 입성에 이어 장제스도 지난에 도착하여 성 안팎을 시찰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장갑차로 무력시위를 감행하고 일본인 거주지역을 요새화하는 한편 '양해 없이 일본군 수비지역에 접근한 자는 단호히 단속한다', '일본군 지역을 침범하면 중대한 외교적 불상사가 될 것이다.'라고 적힌 벽보 등을 내걸며 국민혁명군을 위협했다. 이미 세 사람의 중국인이 일본군에 살해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지난과 같은 중요도시에 일본군이 횡포를 부리는 것을 보며 국민혁명군은 격분했다. 일부 장령들은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군과의 마찰을 피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있었고 장령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 뻗어지지 않고 주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침범당한 원한을 보복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현이 존중하는 바이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대모를 어지럽힌다. 이것이 성현이 훈계하는 바이다."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만 있을 수도 없었던 노릇인지라 장제스는 5월 2일 니시다 고이치 총영사대리를 만나 일본군의 철수와 상업지역의 명도를 요구했으나 니시다 총영사대리는 "우리는 정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장제스|귀하]]의 생각으로 행동을 좌우당할 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다만 국민혁명군을 자극하는 철조망 등은 요청을 받아들여 철거하겠다고 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이 계속 북벌을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문제의 철조망은 5월 3일 새벽에 철거되었다. 다음날인 5월 3일에도 장제스와 니시다 사이의 회담이 벌어졌다. 니시다는 출병의 불가피함을 통보했고 지난에 배치된 일본군의 경비상황을 설명하면서 장제스와 후쿠다 사단장 간의 회견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만 하였다. 장제스를 찾은 니시다는 "지난에 진주한 국민혁명군은 군기나 풍기나 대단히 좋고 더구나 질서가 엄중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지난 파견군은 오늘 철수하기로 했다. 혁명군은 정말 뛰어난 군대이며 이에 비하면 군벌 장쭝창 군은 적수가 안된다."는 말을 했고 니시다와 동행한 헌병사령도 작별인사차 방문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들은 30분간 장제스를 추켜세우며 일본이 얼마나 혁명을 원조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간 지 15분도 되지 않아 지난의 개항장에서 국민혁명군과 일본군이 충돌하였다. 니시다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난데없는 기관총 소리가 들리자 장제스는 처음에는 장쭝창을 의심했으나 장쭝창의 군대는 이미 100킬로미터 이상 패주한 상태라서 반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장제스는 즉각 직속 부관에게 조사를 지시했고 얼마 안 있어 "우리 혁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동포 2명이 일본 병사에게 척살당해 노상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란 보고를 받았다. 제남 사건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날 아침 국민혁명군 40군 소속 병사 한명이 병이 나서 중화민국 외교 산동 교섭서 맞은편 기독교 병원에 실려갔는데 이를 일본군이 저지했다. 말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쟁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그 언쟁을 구실로 발포하여 국민혁명군 병사와 인부를 살해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병원으로 피신했으나 일본군은 병원을 포위하고 기관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일본 육군성은 5월 13일에 다음과 같은 공식 보고를 내놓았다. ||3일 오전 9시 반경, 인상문 밖의 만주일보 중개점 요시후사 집에 중국병 2,30명이 침입하여 약탈을 시작했다. 일본의 영사관 순경 오카다가 달려갔으나 도리어 중국병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 때문에 톈진으로부터 파견되어 있었던 부대의 일부를 현장에 급파했더니 중국병은 부근의 병사로 달아났다. 병사의 보초가 먼저 일본병에게 발포하므로 일본 측도 부득이 응사했다. 이것을 계기로 각처에서 중국병에 의한 약탈적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장제스는 즉각 전군을 각 부대마다 집결시키고 부대를 떠나지 말 것을 엄명했으며 연락장교를 후쿠다에게 보내 충돌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군도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점령지 전 지역을 요새화하고 도로를 모두 차단하여 연락장교는 일본군과 접촉할 수 없었다. 이에 전화를 통한 접촉이 시도되었고 장제스는 성밖의 병력을 모두 철수할 것을 지시하여 오후 5시까지 철수를 완료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사실을 후쿠다에게 통고하고 더 이상 무턱대고 발포하여 중국 인민을 손상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후쿠다는 다시 편지를 보내 쌍방 합동회의를 열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대표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계속되는 총성에 장제스는 일본군이 먼저 자신의 총사령부에 대표를 파견하라며 이를 거부했다. 5월 4일 0시에 이르러 후쿠다가 자신의 사령부에서 교섭하자고 다시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일본군 사령부에 대표를 보내라는 따위의 주장은 일본군에 성의가 없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이날의 충돌을 우연한 일로 보지 않으며, 일본군이 우리를 덮어놓고 적으로 간주하려 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쪽에서 사람을 파견할 수는 없다."고 다시 거부했다. 결국 중간지점인 포진철로 판공처에서 교섭이 이뤄져 국민혁명군 대표 [[슝스후이]]와 일본군 참모장 구로다 슈이치가 회담했다. 슝스후이는 일본 육군대학 출신이라 일본어가 유창했고 일본군 참모 대부분과 동창관계였으나 회담 분위기는 살벌했다. 일본은 슝스후이에게 제남 성 밖 상부의 도로에 중국군의 통과를 금지하며, 중국 측이 교제철로와 진포철로를 이용하여 병력을 수송하지 말 것이며, 중국군을 제남성 20리 밖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슝스후이가 장제스의 의향을 듣지 않고는 서명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하자 쿠로다는 "당신은 장제스의 대표로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서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서명을 강요했다. 이 와중에도 일본군의 도발은 계속되어 회담 중에도 2분에 한번 포격을 가해 통신국과 교통기관이 모두 파괴되었다. 결국 슝스후이는 서명을 거부하고 일본군의 요구사항을 들고 5시에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상황으로 보아 일본군은 우리와 전쟁을 하자는 심산입니다. 우리에게는 두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회담을 결렬시켜 응전하느냐, 아니면 한때의 굴욕을 참고 충돌로 인한 희생을 피해 장래를 기약하느냐 입니다. 일본군은 고압적인 태도로 몇번이나 위협했습니다. 분개를 참을 수 없습니다." 장제스는 슝스후이를 위로하는 한편 스스로도 일본인이 모두 이런식이면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 재앙이 올 것이라고 치를 떨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